(스포일러 주의)
게이머들 모두가 학수고대했고, 반복되는 출시 연기에 정말 제대로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의심과 걱정을 품게 되었으며, 종국에는 모두가 크게 실망했던 게임. 바로 사이버펑크2077이다. 참고로 나는 예약구매를 했지만 2시간 조금 넘게 플레이하고 그 이후로는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
그러니 이미 사펑2077에 대해 악감정을 가진 상태에서 넷플릭스에서 지나가듯 본 타이틀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내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애니메이션까지 나왔어? 어이구 헛짓거리 하네"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내가 사펑 엣지러너를 보게 된 건 다름이 아니고, 게임과 애니메이션의 동시 삽입곡인 I Really Want to Stay at Your House때문이다. 유튜브 추천에 많이 뜨길래 들어봤더니 어디선가 자주 들어본 듯한 노래인 것이다. 노래 자체가 좀 유명한 듯 했다. 노래는 듣기에 꽤 좋았고, 댓글도 애니메이션 주제와 잘 일치한다며 칭찬일색이었다. 애니메이션을 고평가하는 댓글이 너무 많이 보여 결국 시간을 내어 한 번 보기로 했다.
군대에서 마침 내가 근무취침인 날이 있었는데, 애니메이션 하나 정주행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넷플릭스로 사펑 엣지러너를 보기 시작했다.
먼저 말해보는 결론
개인적 취향에서 사이버펑크는 '극호'에 속했다. 스토리 흐름은 평범했다. 인물은 개성적이고 모두가 기억에 남았다. 스토리에 개연성 문제는 별로 없었다. 시각적 연출은 뛰어났으며, 인게임 OST를 적절히 삽입했다. 다 보고 나니 가슴에 남은 건 며칠씩이나 가는 먹먹함이었다.
스토리의 짜임새
일단 엣지러너에 대한 평 중에서 스토리는 오히려 조급했다는 말이 많다. 중간 스토리의 비약이 너무 심했다는 이야기다. 확실히 시간상의 점핑이 존재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좋았다고 생각한다.
엣지러너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결국 주인공 커플 데이비드와 루시다. 그들의 관계 변화부터 최종적 미래까지가 결국 이 작품의 시청자를 열광하게 하는 요소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스토리에서 비약된 부분은 그 둘 간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많지 않다. 디테일하게 묘사될 필요가 없었던 내용들이라 생각한다. 쉽게 말해서 '결과적으로 그다지 중요치 않은' 내용들이었다.
스토리상의 비약을 제외하고는 평범한 스토리였다고 생각한다. 반전은 없었고, 시청자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스토리였다(이것이 단점이 되지는 않는다).
인물의 개성
데이비드가 속한 팀의 대부분이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도 생생히 기억난다. 메인의 죽음 전후로 변하는 데이비드와 루시, 데이비드와 함께하며 변하는 레베카, 스스로의 배신을 후회하는 키위, 의리남 팔코까지. 대부분의 인물들이 개성적이고 상당히 입체적이었다
특히 레베카가 진짜 진국인 캐릭터다. 데이비드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구해주고, 데이비드가 위험한 선을 넘을 것 같을 때마다 조언을 해주며 말리고, 그럼에도 데이비드가 선택한 길을 언제나 지지하고 그가 선택한 목표를 위해 모든 걸 걸고 도와준다. 데이비드가 완전히 망가졌을 때에도 그를 도와줬다. 이 얼마나 헌신적인 짝사랑인지. 게다가 이 캐릭터의 결말은 시청자를 크게 자극한다. 나는 허무감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팔코와 키위도 후반부에 드러나는 맛이 잇다. 키위는 나이트시티에서는 아무도 믿어서는 안된다는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본인이 주워 키워낸 루시를 배신했으나 끝내 후회하고 죽게 된다. 여기까지는 그냥 평범한데, 팔코의 마지막이 중요하다. 데이비드는 마지막에 팔코에게 루시의 신변과 의뢰금 등 몇 가지 약속을 부탁한다. 키위의 나이트시티에서는 그런 부탁은 바보같은 것이다. 팔코는 의뢰보수를 독차지할 수 있었고, 굳이 루시를 챙겨 도망가는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팔코는 데이비드의 부탁을 모두 들어줬다. 의리를 지킨 멋진 중년 아저씨가 되었다. 팔코는 키위가 틀렸다는 걸 몸소 보여낸 것이다. 결말에 이르러서야 알게되는 팔코의 면모는 작품을 다 보고 곱씹을 때 상당히 큰 재미 요소였다.
연출
원작을 잘 구현했네. 작붕이 없네. 퀄리티가 좋네 등... 할 말은 많지만 딱 두 가지가 인상 깊었다. 임플란트에 중독되어 사이버사이코가 되어가는 인물들을 잘 묘사했다. 연출 자체도 퀄리티가 좋아 섬뜩한 느낌을 주었는데, 사이버사이코로의 변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묘사 방식이어서 더 좋았다.
그리고 OST I Really Want to Stay at Your House의 삽입 시점이다. 처음과 마지막, 완전 상반되는 희망과 절망의 상황에서 삽입했다. 특히나 마지막에 삽입되는 이 노래는 극적인 상황으로 끌고가서 엄청난 몰입감을 만들어 주었다. 진짜 노래 잘 뽑았다고 생각한다.
가슴에 남는 먹먹함
이렇게 새드 엔딩으로 끝나는 애니메이션, 게임, 영화 등을 접하지 않은 건 아니다. 오히려 새드 엔딩의 맛을 알기에 더욱 좋아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엣지러너만큼 끝나고서도 먹먹함이 남는 작품은 처음이었다. 다른 것들은 그저 여운이었는데, 이건 먹먹함이다.
왜 그랬던 걸까? 일단 단순하게, '과몰입'이다. 나는 데이비드와 루시에게 과몰입해버린 것이었다. 솔직히 그 이상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다만 이 둘의 관계가 시청자의 과몰입을 이끌어냈다고 생각해보자.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일단 두 인물의 맹목적인 성격이 있다. 데이비드는 나이트시티에서 용병으로 성공하겠다는 메인의 의지를 맹목적으로 계승하고 달성하려 했다. 루시는 데이비드와 함께 달에 가고싶다(정확하게는 그와 함께 미래로 나아가고싶다)는 목표가 있었고, 데이비드를 지키기 위해 위험도 무릎쓰고 아라사카에 적대했다. 둘의 맹목적 행동들은 시청자로 하여금 그들의 스토리에 몰입하게 한다.
다음으로, 간접적으로 나타나는 서로의 애정이 있다. 이게 설명하기 좀 힘들다. 루시와 데이비드는 작중에서 서로에게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등의 언어적인 애정 표현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시간이 지나보니 둘은 동거를 하고 있었다. 그냥 둘이 사귀나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대사와 행동은 간접적으로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심지어 그러한 관계가 한 순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서서히 쌓여온 것이다. 데이비드는 루시가 위기에 처하면 1순위로 구했고, 루시도 데이비드가 위험해지는 순간이 올 때마다 점점 더 크게 분노하게 된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둘의 관계가 묘사되는 부분들이 과몰입에 주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주관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과몰입들이 모여 마지막 결말에서 터지고 작품이 끝나니... 가슴에 먹먹함이 남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OST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사에는 작중에서 나타나지 않은 루시의 속마음이 표현되었는데, 음색은 나름 예쁘지만 전혀 튜닝되지 않는 보이스가 담겨있다. 소녀의 러프한 생목소리로 불러지는 부분은 마치 진짜로 루시가 말하는 듯한 느낌을 들게 했다. 모든 결말을 알고난 뒤에 듣는 이 노래는 여운과 먹먹함은 증폭시켰다. 진지하게, 이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는 경험은 마지막에 OST까지 감상하고 나서야 완성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정리하는 결론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보다 더 뛰어난 스토리라인, 더 뛰어난 인물 구성, 더 뛰어난 연출을 보이는 작품이 많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만큼의 먹먹함을 선사한 것은 없었다. 쌓고 쌓아 마지막에 터뜨리는 구성이 시청자를 더 자극했다. 정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애니메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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